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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정진석 국회의원 - 페이스북 글 논란(식민사관, 정한론), 한미일 군사동맹

by 하늘도깨비- 2022. 10. 18.

최근 정진석 국회의원(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SNS(페이스북) 글이 논란이 일고 있다. 전형적인 식민사관, 친일파적인 의도가 드러난 발언인지 그냥 단순한 문맥상 해석이 다른 실수 인지 연일 시끄럽다. 이는 정진석 의원의 조부가 일제강점기 때 계룡시 면장(친일 행적 의심)을 했다는 사실까지 다시 들춰지고 있어, 파장이 더욱 확대되고 있는 형국이다.


정진석 의원의 글에 대해, 이 글의 내용을 중심으로 배경과, 역사적 사실, 쟁점사항 등에 대해 재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정진석 의원의 페이스북 글 전문을 캡처해왔다.

정진석 페이스북 글 전문
정진석 위원의 페이스북 글 전문 (논란 부분 네모박스)

 

 

1. 정진석 의원의 글이 쓰인 배경, 시발점

   □ 한-미-일 군사 훈련(군사 합동 훈련)

      º 대한민국과 일본이 군사 훈련을 협조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67년 양국 군 인사 교류를 시작해서, 1980년대까지는 두 나라 군 인사들이 오가며 군부대 교류 행사를 하는 수준에 머물렀었다.

      º 과거 이력

- [1999년~ 2017년] 동해와 한국·일본의 중간 수역에서 수색구조훈련(SAREX) 실시 (격년제)
<박근혜 재임기간>
- [2016년 4월, 9월] 북한의 4차, 5차 핵실험
- [2016년 6월, 10월] 하와이 근처에서 첫 `한·미·일 미사일 탐지 추적 훈련` 및 `정례화` 합의
- [2016년 11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 [2017년 4월] 제주 남방 한·일 중간 수역에서 `한·미·일 대 잠수함전 훈련`

<문재인 재임기간>
-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 [2017년 10월, 문재인 재임] 국방장관이 `한·미·일 미사일 경보 훈련`과 `대잠수함전 훈련` 지속 실시하겠다고 발표
- [2018년 6월, 문재인 재임] 하와이 근처에서 `한·미·일 탄도미사일 탐지 추적 훈련`
- [2019년 8월, 문재인 재임] 한국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 11월 종료 결정 유예

<윤석열 재임기간>
- [2022년 6월] 국방장관 `한·미·일 미사일 탐지 추적 훈련 정례화` 및 공개 발표
- [2022년 9월] 30일, `한·미·일 동해 공해상 대잠수함전 훈련` 실시
- [2022년 10월] 6일 `한·미·일 동해 공해상 미사일 방어 훈련` 실시

      º 한··일 군사 합동 훈련의 이력을 살펴보았을 때, 최근 윤석열 정부가 실시한 훈련은 과거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 실시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 과거에는 한 미 일 해군 함정 등이 지금처럼 한 곳에 모이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 혹은 자국 근처 바다에서 각자 미사일 탐지 등을 추적해 정보를 공유하거나, 대잠수함전 훈련 같은 경우에도 제주 남방 한·일 중간수역에서 했었을 뿐, 지금처럼 일본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민감한 독도 근처(동해 공해상)에서 합동 훈련을 한적은 없다.

한겨레 기사 발췌문
한겨레 기사(2022.10.15.) 발췌

 

   □ 이재명 의원(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 [요약]

      º (북한의 남침 이전의 일본의 한반도 수탈) 1950~1953년까지의 북한의 남침(6.25) 전쟁 때도 무수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본이 한반도를 무력 침략하여 6.25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º (독도 근처에서의 한일 합동 군사 훈련) 일본의 목표는 자위대를 군대로 격상시키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로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합동 군사훈련은 우리 대한민국 그들의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국민의 힘이 지적하는 문제의 발언]
      º 이러한 합동 군사훈련은 일본과 미국만을 위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 거부해야 한다.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하나씩 놓이고 있다.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 욱일기가 한반도에 다시 걸리는 날이 올 수도 있다.
      ☞ 필자도 이 발언은 현재의 상황에서 약간 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뒤 문맥 해석할 필요가 없는 명확한 문장이다. (정지석 의원의 SNS 글과 비교하면 그렇다. 정진석 의원의 글은 읽는 사람에게 오해의 여지를 계속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정진석 의원의 글, 무엇이 문제인가?

   □ 식민사관이 은연중 드러나는 문구

      º 식민사관이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 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조작해 낸 역사관`을 말한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와있다. 즉,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조선)를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국민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학문인 것이다. 즉, "우리 조선인들은 열등한 존재이니, 일본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게 바로 식민사관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한번 자세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정진석 의원의 SNS 글 일부>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º 위 글은 정진석 의원의 SNS 글 중 일부이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이 문장은 이미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보인다.
      º 구한말의 조선은 일본보다 개화가 늦었고 뒤쳐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다른 강국들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씩 살펴보면 알 수 있다.

 

   □ 조선이 망한 이유?

<정진석 의원의 SNS 글 일부>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 중략...
조선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

      º 구한말의 조선왕조가 그냥 힘없이 망국의 길로만 갔던 것만은 아니다. 위로는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시도했던 독립협회도 있었고, 아래로는 동학농민들에 의한 사회개혁 운동도 꾸준히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조선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왕실로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이 조선왕조의 나라만은 아니지 않은가? 즉, 그때 당시 조선왕조의 무능만 볼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과 여러 지식인들의 노력도 같이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 특히 정진석 의원의 지역구 중 공주, 부여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이 많다. 그 유명한 최익현 선생님부터, 민종식, 노원섭, 안병찬 등 꺼져가는 조선의 불씨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의병장들이다. 일제의 무력을 앞세운 무자비한 총칼이 아니었다면, 조선을 살리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우리 스스로 개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역사적 사실 오류

<정진석 의원의 SNS 글 일부>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º 이 말의 의미가 참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설마 국회의원이나 되는 분이 일본과 조선이 전쟁을 500여 년 역사 동안 한 번도 없었다고 잘못 알고 있을 리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구한말에 한정하여 당시의 무능하고 무지한 조선이 일본과 제대로 된 전투는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는 전혀 틀린 사실이다.
      º 첫 번째로 조선왕조 전체로 보면, 기록상으로 조선이 건국하고 왜구의 침략은 무려 178회에 이른다. 굵직한 것들만 살펴봐도 삼호왜란(1510),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 그리고 임진왜란(1592년)과 2차 진주성 전투를 기점으로 잠시 휴식에 들어갔지만, 1597년 일본의 재침입인 정유재란 등. 일본은 `조선` 뿐만 아니라 `고려`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끊임없이 우리 한반도를 침략하며 점령하기를 꿈꿔왔던 나라이다.
      º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까지구한말의 상황]으로 한정해보자. 흥선대원군의 집권기(1863년~1873)를 지나, 1884년,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는 김옥균, 박영효 등에 일어난 일명 3일 천하라 불리는 갑신정변이 있다. 갑신정변 때, 청나라 관군과 조선의 관군이 창덕궁과 경우궁을 공격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있었다. (물론 이는 일본군의 맥없는 후퇴로 전투라 부르긴 어려울지 몰라도, 이러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급진 개화파에 의한 민족적 개혁 의지가 총칼을 든 전투보다도 더욱 치열한 전투라 생각한다.)
      º 이렇게 급진 개화파에 의한 개화당 정부는 3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되지만, 이후 청과 일본이 1885년 4월 `톈진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운동(1894년)이 일어나자 민비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톈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하게 된다. 이러자 동학군은 청나라와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내보내기 위해, 조정과 `전주 화약`을 체결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 경복궁 전투(1894년 7월 23일)에서는 2천여 명이 넘는 일본군 보병과 경복궁을 방어하기 위한 조선의 근위병과의 전투가 분명히 있었으며 일본군의 무력에 의해 결국 진압당하게 된다.
      º 그리고 1895년 10월 8일 그 유명한 을미사변(민비 시해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당시에 경복궁 앞에는 일본군의 대포와 무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중과부적이었지만 암살객들과 민비 호위병사들과의 전투가 있었다.
      º 그리고 같은 해 1895년 11월 28일, 실패한 친미 쿠데타 라고도 할 수 있는 춘생문 사건도 있었다.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자, 조선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과 친일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궁에 고립되어 있는 고종을 구출하기 위한 시도였다. 정동파라 불리는 이들(남만리, 이규홍 등)과 언더우드 등 미국과 러시아의 선교사와 공사들이 직간접적으로 호응했다. 하지만 결국 춘생문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실패로 끝나게 된다.
      º 또한 을미의병(1895년), 을사의병(1905년), 정미의병(1907년) 등 일본에 의해 침략당하고 잠식되어 가는 오로지 조선을 구하기 위한 신념으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조선을 위해 싸웠다.

 

 

3. 마무리

      º 구한말 조선의 상황은 분명히 안 좋았다. 일본보다 개화가 늦었고,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10년간 잠시 나라가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물러나게 되고, 민비의 횡포로 나라는 다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 대한 제국은 5천 년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항상 의로운 이들이 일어나 조선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가 많은 역사서와 기록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º 분명한 것은 조선이라는 500년 역사를 막을 내리게 한 직접적 요인은 일본의 침략이다. 이는 부정될 수도 없고, 부정해서는 당연히 안된다. 모든 나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국운을 다하는 데에는 내부적 요인도 있고 외부적 요인도 있다. 내부적으로 우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하여, 탐욕과 야욕의 욕망을 갖는 일제의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우리 손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든) 우리 손으로 이를 충분히 극복하였을 것이다.
      º 남북한이 이념에 의해 분단된 지 어느덧 7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거대한 적을 겨냥해, 맞서 싸워야 하는 거대한 프레임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조선을 넘어, 고려, 고대사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침략해 온 그들이고, 굳이 먼 과거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한반도를 병탄 한 것과 그로 인한 수많은 피해자분들.
         - 이에 대한 명확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는한, 그들과 우리 국익에 아무런 이익이 안 되는 협조와 동맹(특히 한·일 or 한·미·일 군사동맹)을 하는 것은 제2의 톈진조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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