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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숨결, 역사

자주적 독립 좌절과 친일파 청산 실패 : 미군정과 맥아더 포고령

by 하늘도깨비- 2022. 11. 20.

혹시 우리나라가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 이후에 단 한 명의 친일파도 공식적으로 처벌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 고통받았던 우리 민족은, 어쩌면 일본보다도 더 나쁜 친일파 조선인에 대한 처벌을 하지 못한 것인가? 이는 우리가 자주적 독립을 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으며, 그 시작은 바로 맥아더 포고령이었다. 결국 미군정(1945.9.9. ~ 1948.8.15.)의 보호 아래 친일파들은 이제 친미로 노선을 바꿔 다시 권력을 잡게 된다. 

 

1. 미군정의 시작, 맥아더 포고령과 그 의미

 (1) 점령군으로서 미군

우리가 광복 이후,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바로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자주적 독립을 하지 못함에 기인한다. 우리는 해방 이후 자주적 자치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우리 주권(외교, 군권, 행정권 등)을 온전히 되찾지 못하고 1945년 9월 9일부터 미국 육군의 지배를 받는 미군정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군정한반도에 대한 통치 스타일과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바로 1945년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 포고령이다.

 

맥아더 포고령 일부
맥아더 포고령 일부

위의 맥아더 포고령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기본적으로 우리 한반도에 점령군의 성격으로 들어왔음을 스스로 선포했다. 점령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보자면, `군대가 적국의 영토에 들어가 그 지역을 군사적 지배하에 둠`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미국은 한반도를 군사적 지배하에 둔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자치를 일절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미군정이 들어서고 그동안 우리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또한 일제가 물러난 후 우리가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조직한 모든 공식적인 기구는 인정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모두 해체 되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국과 동등하게 협상하기 위해 여운형, 박헌영에 의해 출범된 정부적 조직인 조선인민공화국(1945.9.6.)은 물론, 김구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4.11.~ 1948.8.15.) 또한 포함되었고 미군에 의해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해외에서 가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김규식, 김원봉독립운동가 인사들은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음에도 바로 한반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아주 비극적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미군은 한국광복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한반도에 1945년 10월 정도가 되어서야 차례로 들어올 수 있었으며, 결국 한국광복군은 무장해제 당하게 된다.

 

이는 북한에 주둔한 소련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독립운동가 이자, 당시 청년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여운형미군정(1945년 9월 9일)이 들어서기 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년 8월 15일)를 설립하여 전국적으로 치안대(1945년 9월 6일에 인민위원회로 개편됨)를 설치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26일,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으며,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Chistiakov)는 치안대, 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하였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미군 이외에 일체의 어떤 단체(건준, 인공, 임시정부 등)공식적으로 부정했던 것과는 상반된 입장인 것이었다. 결국 바로 이점에서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 북한과 남한의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친일을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지역, 동네 사람들이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운형, 박헌영이 전국적으로 각 지역에 설치한 인민위원회에서 철저하게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주둔군이었던 소련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친일파들이 숙청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미군정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켰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공식적인 친일파 처벌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2) 맥아더 포고령 제2조 (친일파들의 복귀 명령)

맥아더 포고령 제2조
맥아더 포고령 일부(제2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맥아더 포고령의 제2조가 우리의 큰 불행의 씨앗이었다. 맥아더 포고문 제2조로 인해서, 친일파 처벌은 고사하고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이 오히려 남한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고 1945년 9월 7일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진주하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군인들만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미국은 사실 이때 이미 한반도를 신탁 통치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이는 테헤란 회담, 얄타회담 등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여러 차례 드러났었다.), 이를 위해 한반도를 통치할 행정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의 행정가들이 다시 임용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5년 9월 7일 한반도 인천항에 진주하자마자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제2조에 바로 그 의도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행정가들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하의 행정가들이었고, 이들은 대다수가 친일을 했던 인물들인 것이다.

 

즉,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이제 죽을 날만 기다려 산속으로 숨거나, 도망 다녔던 친일파들에게 1945년 9월 7일 발표된 미군의 맥아더 포고령은 죽음의 우물 안에 내려온 한줄기 빛이었으며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이제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보호하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복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일본이 떠난 상황에서 오히려 원래의 지위보다도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친일파들을 살려줌과 동시에 남한에서 이들에게 더 큰 권력을 주게 된다. 그래서 북한과는 달리 한반도 남쪽에서는 미군정이 끝나는 1948년 8월 15일까지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숙청되지 못하게 된다.

※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강점기 하의 고문기술자 노덕술(1899~1968)을 들 수 있다. 이 노덕술은 미군정하에 서울시 수사과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된다.

 

2. 미국과 소련의 선택과 그 이유

지금까지 해방 직후, 그때 왜 우리는 지독했던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는 났지만 친일파 청산에는 실패하였는지를 당시의 한반도 정세와 함께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소련이 주둔한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자치를 인정하여서 친일파 숙청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그렇다면 소련은 착한 나라였고 미국은 나쁜 나라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왜 미국과 소련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다. 당연히 우리가 막 해방을 맞이했던 1945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련 같은 경우는 한반도가 하루라도 빨리 나라를 건국하게 되면, 한반도에 자신의 위성국가가 생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소련이 주둔한 북한에서는 여운형, 박헌영 등이 국내에 세운 자치 조직들을 모두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줄기찬 독립운동으로 한반도의 독립을 이끌어낸 사회주의자들의 인기를 대중에게서 빼앗고,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대중에게 심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어떠한 형태로의 자치적 조직과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미군이 직접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세력들이 다시 등용되게 되었다. 즉, 미국은 우리의 민족적인 문제(친일파 청산)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마무리

그럼 여기서 한 가지, 당시에 적어도 남한에서 만의 상황을 가정하여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고려해보면, 미군정의 한반도 진주는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세웠던 정부조직의 자치를 인정을 함과 동시에 이러한 조직의 좌편향을 막으며 민주주의가 정착되게끔 하는 것은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주적 정부 조직(충칭 임시정부, 인민위원회 등)으로 하여금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파들의 숙청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독했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 이후에 한반도의 자주적 독립의 좌절 친일파 청산의 실패로까지 이어지는 그 최초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 실패가 오로지 미국만의 탓(맥아더 포고령)이라고 말할 수 있나? 우리 스스로는 그 기회가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결국 미군정하의 일종의 신탁통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끝나게 된다. 이후에 우리는 또다시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었고, 실제로 그 시도 또한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한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 부분은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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