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점차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무렵, 세계열강들은 종전 후 패전국과 그 식민지의 처리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얄타회담이고, 이 회담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겨우 해방된 우리나라는 다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이 되는 뼈아픈 고통을 겪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개요]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나치 정권;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다. 이듬해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연합국과의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게 된다. 그리고 1941년 6월,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까지 침공하면서 전쟁은 동부전선으로 확대되며, 1942년 8월부터 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하여 전세가 급격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후 1943년 9월 8일 추축국 중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게 되고, 1945년 4월30일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로, 1945년 5월 8일 드디어 독일군이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자,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미국의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로,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있게 된다.
[얄타 회담의 개요]
독일의 패망이 가시화되는 시점인 1945년 2월에, 소련의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연합국 미국-영국-소련이 만나게 되며, 이를 얄타회담이라 한다.
얄타회담은 1945년 2월4일 ~ 2월 11일까지 진행되었다. 이보다 앞선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에서의 중국을 대신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의 큰 공로와, 2차 세계 대전에서의 주요 강대국으로의 부상하게 된 소련이 미국, 영국과 함께 회담에 참여하게 된다. 이 당시 영국은 이미 강대국의 지위를 거의 상실한 시점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미국-소련의 회담이라 할 수 있겠다.
얄타회담의 주요 의제는 유럽 문제였고 그중에서도 소련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폴란드의 처리였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소비에트 연방)도 1939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 동안, 폴란드 영토 전체를 독일과 소련이 나눠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전쟁 종료 후에 폴란드의 영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누가 지배할 것인가가, 얄타회담에서의 주요 의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주요 논의 사항으로는 패배한 이탈리아를 외에, 나머지 추축국 독일에 대한 처리와, 일본에 대한 전투를 위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얄타회담 당시의 참여국의 정상은,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우리가 앞선 칼럼에서 `카이로 회담`을 살펴보았었는데, 루스벨트는 기본적으로 이번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전쟁 전의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제국주의 질서를 해체하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전쟁 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얄타회담까지도 루즈벨트는 소련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러-일 전쟁때 소련이 일본에 빼앗겼던 사할린, 쿠릴열도 등을 다시 소련에게 돌려주겠다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현재 사할린과 쿠릴열도 모두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과 소련의 대일 참전]
그렇다면 이러한 연합국들 간의 회담에서 우리 대한민국에 관한 논의는 없었나? 대한민국에 관한 직접적 논의는 여기서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카이로 회담에서와는 달리)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중요치 않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 얄타회담이 결과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이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 일본전의 참전의 결정이었다.
얄타회담이 일어난 때 즈음에 가장 큰 문제는 독일과 일본을 조금이라도 빨리 항복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독일은 이미 소련과의 전투에서 그 힘을 상실하여 이미 패망을 앞두고 있었지만, 일본은 달랐다.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병력의 몇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그 군사적 손실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리고 얄타회담 당시 루스벨트는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였고(실제로 얄타회담 후 두 달 후에 루스벨트는 죽는다.)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이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소련의 대일 참여를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영국의 처칠은 다시 한번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이미 1941년 12월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에게 치명적 패배를 당한 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에 미국을 도와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만주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의 관동군(박정희가 장교로 있었던..)을 깨기에는 미국도 사실 힘에 부쳤던 것 같다. 결국 미국은 자신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면 소련의 일본에의 선전포고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사와는 달리 1945년 8월이 되도록 소련은 쉽사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였을까. 미국은 결국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머뭇거리던 소련은, 일본이 원자폭탄까지 얻어맞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얄타회담의 결과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하면, 러일전쟁때 빼앗긴 사할린 영토까지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패망직전의 일본에 선전포고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말로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게 드디어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1945년 8월 9일 미국은 나가사키에 2차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이 때문이었을까. 일본의 관동군은 소련의 전차부대에 단 며칠 만에 패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어 버린다. 1945년 8월 8일 선전포고를 한지 이틀도 안지나서, 소련은 만주를 가로질러서 일본군을 쫓아 한반도의 북쪽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이때 당시에 미국은 주력부대가 오키나와에서 아직 일본으로 진주도 하지 않은 상태다.)
바로 이렇게 되어 결과적으로 현재, 한반도의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 그 시발점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된 그 궁극적 원인은 결과적으로 얄타회담이었고, 그 회담에서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의 약속이었고, 그리고 생각보다도 소련의 전차부대가 일본의 관동군을 너무 쉽게 물리쳐 한반도의 북쪽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이후, 생각]
우리가 35년 동안 일제강점기(1910.8.29.~1945.8.15.)를 거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35년 동안 우리 백성들과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열사들이 그토록 바라던 바였고, 염원하던 바였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였던 수많은 민족열사들은 이 역사적인 날에 만세를 부르짖으며 기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김구` 선생님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왜그랬을까. 이는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결국 서구 열강들에 의한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에 공식적으로 정부로 인정받지도 못하게 된다.
모든 역사는 결과로서 말하게 되고, 또 다른 상황을 점쳐 보는 것은 결국 가정이다. 그럼 여기서 한번 이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을 한번 해보자 (필자의 주관이 상당 부분 들어간 것이고, 틀리고 맞고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가정1)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하지 않고, 미국만의 힘으로 일본이 패망하게 되었다면?
- 남북 분단의 형태가 아닌 통일된 국가(조선, 고려처럼)를 띄었을 것이다.
-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 따라서 통일된 정권은 정권은 공산정권이 아닌 자본주의의 민주정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시아 전쟁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담당했던 미국의 온전한 승리로, 패전국인 일본과 한반도 또한 미국이 소련에게 양보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미국은 대한민국을 신탁통치에 들어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그렇게 되면 공산정권이 들어올 틈이 없어, 하나의 통일된 국가의 형태를 띄었을 것이다.(남북 분단이 아닌)
다만.. 미국의 신탁통치 기간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짧게는 3~5년으로 끝났을 수도 있고, 길게는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소련에 지배당한 폴란드의 경우(폴란드 인민 공화국;1952~1989)처럼 근 40여 년이 넘길 수도 있는 것이다.
가정2)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의 허무한 패망이 아닌, 미국을 도와 우리나라 광복군이 일본을 패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면?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정점을 우리나라 광복군이 힘을 보탰다면?)
-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미군의 신탁통치에 들어갔을 것이다.
- 어찌 됐든 지금의 남북 분단이 아닌 통일된 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 마찬가지고 그 통일된 정권은 공산정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가정1 과 거의 동일하다. 일단, 일차적으로 그때 당시의 김구의 한국광복군은 정말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1945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 `정진군`을 창설하여 `서울 진공 작전`이라는 작전을 세워 서울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이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작전 수행 한번 못해보고 끝나게 된다.) 하지만 어찌됏든 당시의 우리 임시정부의 군대? 상황을 볼 때 미국의 인상적인 인상을 심어주긴 어려웠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임시정부는 국가로서 인정을 못 받았을 것이다.
가정3) 일본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어 미국에 먼저 쐈다면?? 그리하여 연합국(미국)이 일본에게 졌다면?
- 우리의 일제강점기의 기간은 35년이 아닌, 조금 더 오래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다.
- 결과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독립을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앞선 `카이로 회담`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는 정말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 결과 세계 열강들의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이름을 언급하게 만들었었다. 설혹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하더라도, 1960,70년대에 탈식민지화 바람과, 80,90년대 폴란드, 홍콩 등의 독립에서 보듯이 모든 국가는 결국 식민지 사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있었을 것이다.
[마무리]
분명히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해 주었다. 우리나라의 해방은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승리로 얻어지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미국의 선택으로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다. 이때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소련과 미국에 의해 공산정권과 자본주의가 각각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면 또 다른 패전국인 일본. 논리적, 윤리적, 그리고 같은 패전국인 독일의 사례를 보자면,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바로 일본이어야 되지 않았을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놔두고 왜 우리나라가 분단되었어야만 했나?
결과적으로 강대국(미국)의 선택의 결과였다.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이미 한반도의 북쪽까지 진주해 있던 소련에게 억지로 한반도를 되찾고 일본의 절반을 넘겨주기보다는 한반도의 절반을 넘기는 게 자국(미국)의 이익에 더 나은 쪽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단죄? 그런건 없다. 오로지 철저한 자신만의 국익을 위한 결과였을 뿐이다.
'우리의 숨결,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복 이후 1945년의 국내 한반도 정세(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2) | 2022.11.19 |
---|---|
일제강점기의 끝. 온전치 못했던 독립, 해방(독립운동가, 단체) (0) | 2022.11.12 |
백제 웅진시대 공주산성, 공산성(feat. 공산성 미디어아트) (0) | 2022.10.10 |
카이로 회담, 선언 - `한반도의 독립`이 왜 언급될 수 있었나 (0) | 2022.10.07 |
카이로 회담 - 카이로 선언문이 만들어진 과정 (0) | 2022.10.04 |
댓글